바텐베르크 공자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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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텐베르크 공자 루이는 1854년 헤센 대공자 알렉산더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 제1해군경을 역임했다. 그는 영국 내 반독일 감정으로 인해 사임하고, 1917년 성씨를 마운트배튼으로 변경 후 밀포드 헤이븐 후작으로 봉해졌다. 1921년 해군 원수로 특별 진급했으나, 같은 해 인플루엔자 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헤센의 빅토리아 공주였으며,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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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베르크 공자 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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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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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트비히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 백작 |
출생일 | 1854년 5월 24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그라츠 |
사망일 | 1921년 9월 11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피카딜리 |
안장지 | ワイト島, ウィッピングハムの聖ミルドレッド教会 |
배우자 | 1884년 4월 30일 헤센 대공녀 빅토리아와 결혼 |
자녀 | 앨리스 루이즈, 스웨덴 여왕 조지 마운트배튼, 제2대 밀포드헤이븐 후작 루이 마운트배튼, 제1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백작 |
아버지 | 헤센의 알렉산더 |
어머니 | ユリア・ハウケ |
경력 | |
소속 | 영국 해군 |
복무 기간 | 1868년–1914년 |
지휘 | 제1해군경 (1912년–14년) 本国艦隊 제3 및 제4 사단 (1911년) 大西洋艦隊 (1908년–10년) 제2 순양함 전대 (1905년–07년) 海軍情報部 (1902년–05년) HMS Implacable (1901년–02년) HMS Majestic (1897년–99년) HMS Cambrian (1894년–97년) |
참전 | 앵글로-이집트 전쟁 |
작위 | |
작위 시작 | 1917년 11월 7일 |
작위 종료 | 1921년 9월 11일 |
작위 종류 | 밀포드 헤이븐 후작 |
이전 작위 | 신규 창작 |
다음 작위 | 조지 마운트배튼 |
서훈 | |
훈장 | 바스 훈장 GCB, 로열 빅토리아 훈장 GCVO, 성 마이클 앤드 성 조지 훈장 KCMG, 추밀원, ADC |
기타 정보 | |
직책 | 제1해군경 (1912년–14년) 貴族院議員 임시 영주 |
2. 가계 및 초기 생애
사촌이자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아내인 앨리스 공주의 영향으로, 루이는 14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영국 왕태자 앨버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와 초기부터 친분을 쌓았으며, 해군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경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바텐베르크의 루이 알렉산더는 1854년 5월 24일 오스트리아 제국 그라츠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헤센의 알렉산더 공이었고, 어머니는 율리아 폰 하우케 백작 부인이었다.
아버지 알렉산더는 헤센의 루트비히 2세 대공과 대공비 빌헬미네 사이의 아들이었으나, 어머니의 혼외자식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여동생 마리아(훗날 러시아의 황후)와 함께 하이젠베르크 성에서 자랐다. 여동생이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2세와 결혼한 후, 알렉산더는 러시아에서 군 경력을 쌓았다. 그곳에서 그는 여동생의 시녀였던 평민 출신의 폴란드계 귀족 여성 율리아 하우케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알렉산더를 아꼈지만, 신분 차이를 이유로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알렉산더와 율리아는 도피하여 귀천상혼을 했고, 이로 인해 알렉산더는 헤센 대공가의 계승권을 잃고 러시아에서도 추방되었다. 헤센으로 돌아온 후, 알렉산더의 형인 루트비히 3세 대공은 율리아에게 바텐베르크 백작부인 칭호를 주었고, 나중에는 바텐베르크 공비로 승격시켜 그녀의 자녀들이 바텐베르크 공자 또는 공녀 칭호를 받도록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루이는 귀천상혼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헤센 대공가 작위를 상속받지 못했다. 그는 태어날 때 어머니의 작위에 따라 '예하(His Illustrious Highness)'라는 경칭과 함께 바텐베르크 백작 칭호를 받았다. 1858년 12월 26일, 어머니 율리아가 공비로 승격되면서 '세레니시마 전하(Her Serene Highness)' 경칭을 받게 되자, 루이 역시 자동으로 '전하(His Serene Highness)' 경칭과 함께 바텐베르크 공자 칭호를 얻게 되었다.[4]
루이는 헤센의 루트비히 4세 대공,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 그리고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 부인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비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와 사촌 관계였다.[6]
루이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군 점령 하의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했다. 루이는 어린 시절을 북부 이탈리아와 헤센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인 유겐하임의 하이리겐베르크 성과 다름슈타트의 알렉산더 궁전에서 보냈다. 어머니 율리아는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영국인 가정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루이는 자연스럽게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3개 국어를 구사하며 자랐다.[5]
그의 사촌인 헤센의 루이 공과 그의 아내 앨리스 공주(빅토리아 여왕의 딸)의 영향으로, 루이는 영국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68년 10월 3일, 14세의 나이로 영국에 귀화하여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7][8] 당시 그는 건강 검진에서 "작고 평평한 가슴, 약간의 척추 측만증 및 시력 결함"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나, 왕실과의 관계 덕분에 특별히 입대가 허가되었다.[9][10] 그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옛 기함이자 당시에는 정박 중인 수용선으로 쓰이던 HMS 빅토리에서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11]
이듬해 1월, 당시 영국 왕세자였던 앨버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와 왕세자비 알렉산드라는 프리깃함 HMS 아리아드네를 타고 지중해와 흑해를 순항했는데, 왕세자는 루이가 훈련을 마치기 전에 이 배에 승선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12][13] 이 순항 중에 루이는 왕세자 부부와 함께 이집트를 방문하여 수에즈 운하 건설 현장을 둘러보았다. 당시 이집트의 헤디브였던 이스마일 파샤는 관례에 따라 일행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루이는 메지디예 훈장 4등급을 받았다.[14] 같은 해 4월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부터 오스마니예 훈장 4등급을 받았다.[15]
3. 영국 해군 경력
1884년 4월, 루이는 루트비히 4세의 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여 영국 왕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군사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해군에서 꾸준히 승진하여 1912년에는 최고위직인 제1해군경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독일 귀족 출신이라는 점과 영국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는 때때로 그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내에 고조된 반독일 정서로 인해 결국 1914년 제1해군경 직에서 물러나 와이트 섬의 자택 켄트 하우스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17년 7월 14일, 영국 내 반독일 감정이 극심해지자 루이는 조지 5세 국왕의 요청에 따라 독일의 귀족 지위와 바텐베르크 성을 포기하고, 성씨를 영국식인 '''마운트배튼'''(Mountbatten영어)으로 변경했다. 3일 뒤인 7월 17일, 국왕으로부터 영국 귀족 작위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를 받았다. 이후 루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장녀 앨리스를 제외한 자녀들은 마운트배튼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쟁 후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1921년 독감으로 사망했다.
3. 1. 입대 및 초기 경력
앨리스 공주는 루이의 사촌이자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아내였는데, 그녀의 영향으로 루이는 14세가 되던 1868년에 영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입대 직후 영국 왕태자 앨버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 부부의 지중해와 흑해 순방에 동행하면서 앨버트 에드워드와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69년 5월 영국으로 돌아온 루이는 6월에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 제도 기지의 기함인 로열 앨프리드에 합류하여 10월에 정식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16] 1870년 6월부터 9월까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7]으로 인해 잠시 독일에서 휴가를 보냈으나, 이후 3년 반 동안 아메리카 대륙(버뮤다 및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서 근무하며 초기 훈련 과정을 마쳤다.[18] 1874년 초 유럽으로 돌아와 포츠머스의 해군 기지 엑설런트에 배치되었으며,[19] 중위 시험(Sub-lieutenant examination)에서 해상 기술 부문 역대 최고 점수, 포술 부문 역대 공동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20]
1875년, 다시 웨일스 공의 초청을 받아 세라피스에 합류하여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이어진 웨일스 공의 인도 공식 방문에 동행했다.[21] 루이는 방문 중 여러 장면을 스케치했으며, 그의 그림 일부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리기도 했다.[22] 1876년 5월 15일에는 소위로 진급했다.[23] 웨일스 공은 루이에게 말보로 하우스에 머물 것을 권유했지만, 루이는 해상 경험을 더 쌓기 위해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술탄에 소위로 합류했다.[24] 이 배에서 그는 알프레드 공작의 시종 역할을 겸하면서 해군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공작이 다소 까다로운 성격이었고[25] 선실에 쥐가 들끓는 등[26] 근무 환경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술탄'은 1876년 7월부터 지중해를 순항했다.[24]
1878년 초, 러시아-터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루이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정박 중이던 '술탄'에서 계속 복무했다. 이때 러시아군 소속으로 참전 중이던 동생 불가리아 공작 알렉산더를 방문한 일로 잠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조사 결과 루이와 알렉산더, 알프레드 공 모두에게 잘못이 없음이 밝혀졌다.[27] 이후 2년 동안 루이는 아쟁쿠르와 왕실 요트 오스본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1879년 10월, 왕실 요트 근무가 자신의 전문적인 해군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추가 근무를 거부하고 현역 임무를 기다리며 반액 봉급 상태를 자청했다.[28]
1880년 2월 17일, 루이는 아버지, 그리고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 머물던 중, 스테판 찰투린이 차르를 암살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폭발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29] 같은 해 8월 24일, 루이는 비행 함대(Flying Squadron)의 기함인 인컨스턴트에 배치되었다. 이 함대에는 당시 앨버트 빅터 왕자와 조지 왕자(훗날 조지 5세)가 복무하고 있던 바칸테도 속해 있었다. 함대는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호주, 피지, 일본, 중국, 홍콩,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전 세계를 순항한 후 1882년 4월 남아프리카로 돌아왔다.[30] 이 항해 중에 여배우 릴리 랭트리가 루이의 사생아 딸 잔 마리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랭트리는 과거 웨일스 공의 애인이기도 했다. 잔 마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루이는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는 합의를 했다.[31][32][33]
남아프리카에서 '인컨스턴트'는 세인트헬레나와 카보베르데를 거쳐 지브롤터로 이동했으며, 이후 영국-이집트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몰타와 이집트로 파견되었다.[34] 1882년 7월 11일 알렉산드리아 폭격에 참여했으며, 이후 2주 동안 비행 함대 소속으로 전투 함대에 포탄과 탄약을 전달하고 라스 알 틴 궁전에서 헤디브를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35] 이 공로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직접 이집트 전쟁 훈장을 받았다.[36]
1882년 11월 '인컨스턴트'에서 하선한 루이는 다름슈타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이듬해 3월에는 불가리아 공작이 된 남동생 알렉산더를 방문했다.[37] 알렉산더는 1879년 유럽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아 불가리아의 통치자가 된 상태였다. 루이는 동생과 함께 터키를 방문한 후 터키 해군과 함께 키프로스와 성지를 순방했는데, 이때 터키 해군 장교들이 항해술 부족으로 해안선에 의존해 항해하며 자파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다. 심지어 귀환 중에는 배가 좌초되는 경험까지 했다.[38]
3. 2. 해군 장교로서의 성장
사촌인 헤센의 루트비히 4세 대공의 아내 앨리스가 영국 공주였던 인연으로, 14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영국 왕세자 앨버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 부부의 지중해와 흑해 순방에 동행하며 왕세자와 친분을 쌓았다.
루이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자 군사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해군 내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1912년에는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인 제1해군경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독일 귀족 신분과 영국 왕실과의 관계는 때때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특히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 내에 고조된 반독일 정서로 인해 1914년 해군에서 물러나 와이트 섬의 자택인 켄트 하우스에서 은거하게 되었다.
3. 3. 지휘관 및 참모 경력
1885년 8월 30일, 여왕의 요트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날 루이는 사령관으로 진급했다.[44][45] 이후 4년 동안 그는 육상 시설인 HMS Excellent와 HMS Vernon에서 반액 봉급으로 근무했으며, HMS ''Cambridge''에 승선했고, 1886년 8월에는 잠시 밀포드 헤이븐에 머물렀다가 지중해에서 HMS ''Dreadnought''에 탑승했다.[46] 그러나 그의 ''Dreadnought'' 임명은 논란을 낳았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영국 국회의원 윌리 레먼드와 자유당 의원 찰스 오거스터스 밴시타트 코니베어는 영국 하원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코니베어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 외국인을 30명가량의 영국 장교들을 제치고 진급시켰는가?"라고 질문했다.[7] 이에 대해 해군 장관 조지 해밀턴 경은 "''Dreadnought''의 사령관인 스테픈슨 대령이 바텐베르크 공자 루이를 임명해 달라고 신청했다"고 답하며, 바텐베르크보다 계급이 낮은 사령관 22명도 비슷한 직책을 맡고 있으며[7] 바텐베르크는 귀화한 영국 시민이라고 덧붙였다.[8] 다른 자유당 의원 에드워드 피커스길 등은 그가 왕실의 특혜로 해군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필요한 신체검사 증명서 없이 임명된 것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했다.[9]
1889년 10월 3일, 바텐베르크는 어뢰 순양함 HMS ''Scout''의 지휘를 맡아 첫 독립적인 지휘관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 배는 홍해에서 복무했다.[47] 1891년 12월 3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48][49]
1892년 초, 그는 요새 사찰관의 해군 고문으로 임명되어 해군과 육군 간의 연락 및 방어 협력을 담당했다.[31] 전통적으로 두 군 사이에는 마찰이 많았으나, 루이는 뛰어난 사교술을 발휘하여 협력을 증진시켰다.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는 그에게 "귀하는 내가 항상 보기를 원했던 상호간의 선의와 만장일치를 이끌어냈으며, 귀하의 재치와 건전한 판단력으로 이를 최대한 실현했습니다"라고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50] 같은 해, 바텐베르크는 선박 간 상대 위치 변화에 따른 항로와 속도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상대 속도 아날로그 컴퓨터 장치인 바텐베르크 코스 지시계를 발명하여 항해술 발전에 기여했다.[51][52]
1894년 2월, 그는 방어에 관한 해군 및 육군 위원회(훗날 제국 방위 위원회)의 공동 비서로 임명되어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31] 이후 그는 1894년 10월부터 1897년 5월까지 지중해 함대 소속 HMS ''Cambrian''의 함장을 맡았고,[53] 1897년 6월부터는 영국 해협 함대 소속 HMS ''Majestic''의 함장을 역임했다.[53]
해군 및 육군 방어와 상호 작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1899년 6월 그가 해군 정보국의 부국장으로 임명되는 배경이 되었다.[54] 그는 유럽 왕가와의 인맥을 활용하여 다른 나라 해군 함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해군성에 제출했다.[55] 그는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으며,[56] 이후 에드워드 7세와 조지 5세 국왕 치하에서도 이 직위를 유지했다.[57]
1901년 9월 10일, 그는 새로 건조된 전함 HMS ''Implacable''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1년간 지중해에서 복무하며 해군 훈련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59] 1902년 9월 말, 지중해 함대 부사령관 버제스 왓슨 소장이 갑자기 사망하자 임시로 2등 준제독으로 임명되어 추가적인 책임을 맡게 되었다.[60] 같은 해 11월, 그는 해군 정보국장으로 임명되었다.[61][62] 당시 셀본 백작 윌리엄 파머는 그를 "내가 만난 가장 똑똑한 해군 장교"라고 평가하며 이 임명을 지지했다.[63] 그러나 전임 국장이었던 레지날드 커스턴스 소장은 과거 해군 정보국에서 바텐베르크의 상사였으며, 그가 자신의 후임으로 승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64]
3. 4. 제독 승진 및 제1해군경 임명
1904년 7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으며,[65] 같은 해 유럽 왕실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도거 뱅크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31] 이듬해 2월, 기함으로 HMS 드레이크를 사용하는 제2 순양함 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년간의 성공적인 임기 동안 전대는 그리스, 포르투갈, 캐나다, 미국을 방문했으며, 특히 미국 언론은 루이 공의 예의 바르고 소탈하며 민주적인 태도를 호평했다.[52][66] 제2 순양함 전대 사령관 임기를 마친 후, 조카 빅토리아 유제니 오브 바텐베르크가 여왕으로 있는 스페인을 추가로 방문하고, 1907년 기함으로 HMS 베너러블을 사용하는 지중해 함대 부사령관으로 중장 대리 계급으로 임명되었다.[67]
1907년 8월,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기함을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옮겼다.[67] 이듬해인 1908년에는 정식으로 중장으로 진급했으며,[68] 대서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9] 역사가 앤드루 램버트는 바텐베르크를 "평균보다 더 지적이지만 다소 게으른" 바다를 사랑하는 제독으로 평가하며, 그의 지휘 아래 함대 훈련이 "무기와 전략에 대한 최신 사고방식을 반영하여 더 큰 현실감을 가졌다"고 언급했다.[69] 1909년에는 블라디미르 세메노프 사령관의 회고록 ''The Reckoning|더 레커닝영어''을 번역하여 출판했으며, 루이 블레리오가 최초로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70] 2년 후인 1911년, 새롭게 구성된 제3 및 제4 사단 홈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는 해군 내에서 존 피셔 경 제독과 찰스 베레스포드 경 제독 사이에 해군의 방향과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심했던 때였다. 루이는 피셔의 현대화 노력을 대체로 지지했지만 그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피셔의 반대자들로부터 승진에 방해를 받기도 했다.[71]
1911년 피셔는 루이를 제1 해군 장관으로 추천하며 "그는 해군 장성 명단에서 단연코 가장 유능한 행정가입니다."[72]라고 평가했지만, 영국 언론은 그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임명을 반대했다. 호레이쇼 바텀리는 "우리의 국방 기밀을 외국 태생의 관리에게 맡기는 것은 제국에 대한 범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73] 결국 1911년 12월, 루이는 해군성으로 복귀했으나 제1 해군 장관이 아닌 제2 해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제2 해군 장관으로서 그는 해군 병사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추진하고, 전쟁 발발 시 해군의 작전 계획을 준비할 해군 참모부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74] 1912년 7월 13일에는 제독으로 진급했다.[75]
약 1년 후인 1912년 12월 8일, 바텐베르크는 마침내 프랜시스 찰스 브리지먼 브리지먼 제독의 뒤를 이어 제1해군경에 임명되었다.[76] 그러나 군사 역사가 휴 스트라찬은 바텐베르크가 "피셔의 독단성이 부족했다. 처칠(당시 해군 장관)에게 그가 매력적이었던 점은 그의 유연성이었다. 빈번한 교체와 무능한 임명자들 윌슨, 브리지먼, 바텐베르크의 조합은 전쟁 전 4년 동안 영국 해군의 전문적인 지도력이 방향성을 잃게 했다. 권력은 이제 군의 민간 수장 윈스턴 처칠에게 있었다."[77] 1913년 말, 바텐베르크는 처칠이 그의 전 상관인 레지날드 커스턴스를 해군 참모 본부장으로 임명하려는 제안에 대해 역사가 니콜라스 램버트가 묘사한 "특이할 정도로 격렬한 반대"를 표명했고(대신 도베턴 스터디가 임명되었다). 잭 샌더스, 아서 발푸어의 전 정치 비서는 한때 해군성에 있는 자신의 많은 정보원들이 바텐베르크가 처칠에게 굴종하고 처칠의 메모에 종종 적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는 말 때문에 그의 별명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였다고 기록했다.
제1해군경으로서 바텐베르크는 함대의 준비 태세와 해군 전략 수립, 그리고 전쟁 시 영국 무역을 억제할 수 있는 보험료 인상을 막는 데 필수적인 상선에 대한 국가 보험 제도의 개발에 대해 해군 장관에게 책임을 졌다.[78]
세계 대전 직전, 처칠과 바텐베르크는 훈련 기동 후 영국 함대의 분산을 취소하여 영국 해군의 전투 준비 태세를 유지하기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31][79] 앤드루 램버트의 관점에서 "처칠은 전쟁이 발발하면 피셔를 소환할 계획이었지만, 그를 더 일찍 소환하여 전쟁을 예방할 기회를 놓쳤다. 피셔의 조언을 받은 어떤 내각도 7월 [1914] 위기에 그렇게 엉뚱하고, 무능하며, 재앙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은 7월 [1914]에 매우 불확실한 소리를 내어 독일인들이 영국이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젊은 해군 장관의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제1 해군 장관 루이 오브 바텐베르크 공자의 무기력한 습관 사이의 대조는 피셔의 소환을 거의 불가피하게 만들었다."[80]
3. 5. 제1차 세계 대전과 사임
1912년 루이는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인 제1해군경(First Sea Lord)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독일 귀족 신분과 영국 왕실과의 관계는 해군 내에서 일부 경계심을 낳는 요인이었다.[72][73]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당시 해군성 장관(First Lord of the Admiralty)이었던 처칠과 함께 바텐베르크는 훈련 기동 후 영국 함대의 분산을 취소하여 영국 해군의 전투 준비 태세를 유지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31][79] 제1해군경으로서 그는 함대의 준비 태세 유지, 해군 전략 수립, 그리고 전쟁 발발 시 영국 무역로 보호를 위한 상선 국가 보험 제도 개발에 기여했다.[78]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내에 반독일 정서가 거세게 일었고, 독일 출신인 루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호레이쇼 바텀리와 같은 인물들은 "우리의 국방 기밀을 외국 태생의 관리에게 맡기는 것은 제국에 대한 범죄"라며 비난했고,[73] 찰스 베레스포드 경 제독 등은 이러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83] 전쟁 초기, 루이는 통풍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가 창설했던 해군 참모부도 원활히 기능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81] 1914년 8월 6일에는 프랑스 해군 참모 차장 앙투안 슈베레와 런던에서 만나 양국 해군의 작전 책임 분담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여, 지중해 작전 지휘권을 프랑스에 위임하는 등 동맹국과의 협력을 조율했다.[82]
결국 거센 여론과 정치적 압박에 밀려 처칠은 1914년 10월 27일 루이 공자에게 제1해군경직 사임을 요청했다.[84] 루이는 "정부가 어떤 공개적인 발표로도 저를 지지할 만큼 강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심경을 토로하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85][86] 그의 사임에 대해 많은 동료 해군 장교들과 정치인들이 유감을 표했다. 노동당 정치인 J. H. 토마스는 ''더 타임스''에 기고하여 "가장 비열하고 경멸스러운 중상모략"에 굴복한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89] 존 헤이 경 제독은 이러한 비난이 독일에서 비롯된 "교묘하게 퍼뜨려진 거짓말"일 것이라고 주장했다.[90] 조지 5세 국왕은 루이를 영국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하며 그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31]
사임 후 루이는 전쟁 기간 동안 공직을 맡지 못하고 와이트 섬의 켄트 하우스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91] 그는 이 시기에 해군 훈장에 관한 포괄적인 백과사전을 저술하는 데 몰두했으며, 이 책은 3권으로 출판되어 해당 분야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평가받는다.[92] 전쟁이 끝난 후 해군 복귀를 희망했지만, 1918년 12월 제1해군경 로슬린 웨미스 제독으로부터 젊은 장교들의 진급을 위해 은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루이는 이를 받아들여 1919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퇴역했다.[93][94]
한편, 전쟁 중 영국 내 반독일 감정이 극심해지자 조지 5세는 왕가의 독일식 칭호를 포기하고 윈저라는 영국식 성을 채택했다. 국왕의 요청에 따라 루이 역시 1917년 7월 14일 헤센의 공자(Prince of Battenberg) 칭호와 '전하'(Serene Highness) 경칭을 포기하고, 가문의 성을 독일식인 Battenberg|바텐베르크de에서 영어식인 '''Mountbatten|마운트배튼영어'''으로 변경했다.[95] 3일 뒤인 7월 17일, 국왕은 그에게 영국 귀족 작위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 작위를 수여했다.[96] 이후 루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장녀 앨리스를 제외한 자녀들은 마운트배튼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4. 영국 귀족으로서의 삶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내에 퍼진 반독일 정서는 독일계였던 루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국 왕실 역시 독일과의 혈연 때문에 친독일적이라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에 조지 5세 국왕은 1917년 왕가의 성을 영국식으로 바꾸고 독일 관련 작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국왕의 요청에 따라 루이는 1917년 7월 14일, 헤센의 바텐베르크 공자 칭호와 '전하(Serene Highness)' 경칭을 포기했다. 동시에 그는 가문의 성씨를 독일식 '바텐베르크(Battenberg)'에서 영어식인 '마운트배튼'(Mountbatten영어)으로 변경했다. '바텐힐(Battenhill)'이라는 이름도 고려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마운트배튼이 채택되었다.[95] 11월 7일, 국왕은 그에게 영국 귀족 작위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 메디나 백작, 올더니 자작 작위를 수여했다.[96] 조지 5세는 공작 작위도 제안했지만, 루이는 공작에게 요구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감당할 재정적 여유가 없어 이를 사양했다.[97]
이러한 변화는 테크 가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 등 다른 독일계 영국 왕족 친척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루이의 아내 빅토리아는 더 이상 헤센 공녀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밀포드 헤이븐 후작 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세 자녀(장녀 제외) 역시 왕자/공녀 칭호 대신 영국 후작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예우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1903년 그리스 왕가와 결혼한 장녀 앨리스 공주는 이미 그리스 왕족이었기에 마운트배튼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앨리스의 외아들인 그리스 및 덴마크의 필립 공은 1947년 영국 시민으로 귀화하면서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채택했다.[98] 성씨와 칭호를 바꾼 후, 루이는 장남 조지의 집 방명록에 "하이드 공자가 도착하여 지킬 경이 떠나다"라고 적으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기도 했다.[99]
전쟁 기간 동안 루이는 개인적인 비극도 겪었다. 그의 처제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녀가 러시아 혁명 와중에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엘리자베타 대공녀의 유해는 오랜 과정을 거쳐 1921년 1월, 그녀의 생전 바람대로 예루살렘에 안장되었으며, 루이 부부는 장례식에 참석했다.[100]
전후 1919년, 루이 가족은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와이트 섬에 있던 자택 켄트 하우스를 매각해야 했다.[101] 그는 소장하고 있던 해군 훈장 컬렉션까지 팔아야 했다. 러시아 제국에 투자했던 자산은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고, 독일에 보유했던 자산 역시 독일 마르크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102] 1920년에는 아버지 알렉산더 공자로부터 상속받았던 하일리겐베르크 성마저 매각했다.[103]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루이는 영국 해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1년 신년 훈장에서 군사 부문 바스 훈장 기사단 대십자 훈장(GCB)을 수여받았다.[104] 또한 1921년 8월 19일에는 해군 원수 계급으로 특별 진급하는 영예를 안았다. 며칠 후, 그는 차남 루이 마운트배튼이 복무 중이던 군함 HMS 리펄스에 초청받아 일주일간 항해를 함께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105] 1921년 9월 11일, 루이는 런던 피카딜리의 해군 및 군사 클럽 부속 건물에서 인플루엔자를 앓은 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후, 그의 유해는 와이트 섬의 휘핑엄에 있는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102]
루이의 장남 조지 마운트배튼이 밀포드 헤이븐 후작 작위를 계승했다. 차남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이후 해군에서 아버지처럼 제1해군경의 자리에 올랐으며, 마지막 인도 부왕을 역임했고 1947년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작위를 받았다.[106]
5. 결혼과 자녀
1883년 9월, 빅토리아 여왕은 루이를 여왕의 요트 HMY ''빅토리아 앤 앨버트''에 임명했다. 이듬해인 1884년 4월 30일, 루이는 다름슈타트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여왕의 외손녀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했다.[39] 빅토리아 공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딸인 영국의 앨리스 공주와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장녀였다. 헤센 가문을 통해 루이와 빅토리아 공녀는 이종사촌 관계였으며,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40] 두 사람은 항상 서로에게 영어로 대화했다.[41] 결혼 선물로 루이는 영국 바스 훈장과 헤센 루이 훈장의 별과 사슬을 받았다.[42]
루이와 빅토리아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앨리스 | 1885년 2월 25일 | 1969년 12월 5일 | 1903년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하여 에든버러 공작 필립을 포함한 자녀를 낳았다. |
루이즈 | 1889년 7월 13일 | 1965년 3월 7일 | 1923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했으며, 사산한 딸 한 명을 두었다. |
조지 | 1892년 11월 6일 | 1938년 4월 8일 | 1916년 나데즈다 미하일로브나 드 토르비 백작 부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
루이 | 1900년 6월 25일 | 1979년 8월 27일 | 1922년 에드위나 애슐리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
1885년에는 루이의 동생인 하인리히 공자가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인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했다. 베아트리스 공주는 결혼 후에도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곁을 지키며 비서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 영국에서 여왕과 함께 거주했다.[43]
6. 유산 및 평가
루이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영국 해군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912년에는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인 제1해군경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독일 귀족으로서의 배경과 영국 왕실과의 관계는 해군 내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내에 고조된 반독일 정서 속에서 그의 독일계 혈통은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루이는 1914년 제1해군경 직위에서 물러나 와이트 섬의 자택 켄트 하우스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1917년 7월 14일, 루이는 독일식 성인 바텐베르크Battenbergde와 독일 귀족 칭호를 포기하고, 성씨를 영국식인 '''마운트배튼'''Mountbatten영어으로 변경했다. 사흘 뒤인 7월 17일,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밀포드 헤이븐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루이와 아내 빅토리아, 그리고 이미 그리스의 왕자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장녀 앨리스를 제외한 자녀들은 마운트배튼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결정은 훗날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앨리스의 아들인 필립 공이 1947년 엘리자베스 2세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외가의 성을 따라 필립 마운트배튼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루이 개인과 가문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의 처제들인 엘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1921년 1월, 루이 부부는 오랜 운구 끝에 예루살렘에 안장된 엘리자베타 대공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러시아 투자 자산을 몰수당했고, 독일 자산 역시 독일 마르크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가치를 잃었다. 이로 인해 1919년에는 켄트 하우스를, 1920년에는 아버지 알렉산더로부터 물려받은 하일리젠베르크 성마저 매각해야 했으며, 해군 시절 받은 훈장까지 팔아야 할 정도였다. 1921년, 루이는 인플루엔자로 사망했다.
루이 마운트배튼의 삶은 귀천상혼으로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문제와 외국인에 대한 배척, 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일계 혈통이라는 이유로 영국 해군 최고위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그의 가문은 성씨 변경을 통해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후손들은 영국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개인이 겪는 소속감의 문제와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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